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자군 전쟁 (문단 편집) ===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 >루지에로의 '십자군'에는 실제로 십자군이 거의 없었으며,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군사들은 대부분은 현지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를 믿는 시리아인들, 프랑크족 정착민들이었다. 루지에로가 전사한 후 최후의 저항을 이끌었던 영웅적인 기사는 아르메니아인이었는데, 그는 서방 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적 기준에서 이단자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들을 패배시킨 군대는 명목상으로는 무슬림이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애매한 입장이었으며, 흔히 상상하는 '사라센인'이나 '베두인족'보다는 훈족이나 몽골 전사들을 닮았고 서쪽에서 온 프랑크인들만큼이나 이 지방에서 이방인들이었다. >상황은 더 복잡한 것을 넘어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 >Steve Tibble, ''The Crusader Armies: 1099-1187''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십자군 전쟁을 이해타산[* 사실상 대부분의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났다.]으로 일어난 것으로 봤으면 봤지,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보지는 않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학계에서는 십자군 전쟁은 명분과는 한참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미 '십자군의 탈선'인 4차 십자군이 아주 똑똑히 그 진상을 보여준 바 있다.] 딱히 새로운 해석이랄 것도 없다. 우선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 운운하기 전에 맨 처음으로 성전 드립을 쳤던 것은 서유럽도 이슬람도 아닌 동로마의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로마를 침공해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털어먹고 [[성십자가]]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신흥세력으로 일어났고, '종교적 동기'에 의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털어먹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서 프랑스로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막기 위해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해야 했다. 여기서 십자군만 똑 떼어내어서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미친 짓이네'라고 할 이유가 없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기독교 vs 이슬람' 전쟁이 아니었고 조금만 파고들면 기독교인끼리도, 무슬림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이다. 예를 들면 정교회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선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십자군들도 동로마가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투르크와 협상으로 뒤통수 친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같은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기도 하여 십자군이 펄쩍 뛰기도 했다.[* 서열상 알렉시오스가 위고 동로마가 신성 로마 제국을 황제 책봉을 해준 일이 있기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 조공 책봉처럼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민중십자군의 헝가리 공격이나 4차 십자군의 자라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엿먹였다는 얘기다. 한편 이슬람 세계에서는 기독교 세계가 내분하는 것 보고 열심히 자극받아 자기들도 [[시아파]], [[수니파]],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나중에는 [[몽골]]계로 막 나누어져 서로 잘 싸웠다. 특히 이슬람 내부의 민족, 종파 간의 분쟁은 기독교의 분쟁보다 더 심했다.[* 지금도 [[이슬람]] 세계의 민족, 종파간의 분쟁은 다른 종교들보다 극심하다.] 기독교 측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정치적 계기가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이었다면, 이슬람 쪽에서는 아바스조 치하든, 우마이야조 치하든 예전의 안정된 통합 칼리파 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내부적인 '성서의 백성' 전통에 따라 적당히 돈만 받고 성지 인근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알아서 살게 내비두던 걸 중동 세계가 시아파 파티마조와 튀르크계 수니파인 셀주크 제국으로 양분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의 군벌들이 예루살렘을 번갈아가며 지배하면서 기존의 기독교도, 유대인들과 유지하던 첨예한 관계가 깨져 유럽의 귀에 들어갈 만큼 무슬림 군주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기들끼리 싸워댔고 배신과 뒷치기도 흔했으며 시리아에선 아예 영주들이 반대 세력 없애겠다고 줄줄이 예루살렘 왕국에 동맹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고 십자군 전쟁을 아주 잘못 본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훨씬 더 복잡, 다양한 뒷배경과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듯이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 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 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식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의 발굴과 이분법적 시각의 분쇄로, 매든은 저런 낡은 사관은 이제 학계에서 이미 박살났다고 단언하는 입장까지 취하고 있다.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야만성 운운하면서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학살, 예루살렘 학살, 마라트 안 누만 식인 사태 등이 거론되었지만 이런 행위를 십자군만 하지도 않았고 십자군 역시 관용을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십자군이 정복한 아르메니아, 에데사 지역이 무슬림 영토였나면 그것도 아니고 거긴 정교도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 군대 역시 [[장기 왕조|장기]]나 [[바이바르스]]는 다른 이슬람 종파들을 대상으로 허구한 날 학살과 약탈을 벌여 같은 무슬림들에게 악당으로 증오받았다.[* 다만 이슬람 측에서 관대함을 대표하는 건 살라흐 앗 딘이었지,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이슬람 다른 종파에게도 악랄하기로 악명이 자자하였고 십자군을 까고 십자군 전쟁을 종교적인 미친 전쟁이라고 미치도록 비난하던 근현대 서구 역사가들도 살라흐 앗 딘을 '관대한 이슬람 대왕'이라고 찬양하던 것과 달리 이 둘은 '십자군과 종교가 다르다 뿐 똑같은 학살자'라고 비난했었다 이들이라고 무조건 '이슬람은 죄다 관대하다능~ 기독교는 악마색히'라고 한 게 아니다.] 이런 건 무시하는 것을 악질적 취사선택과 허수아비 찌르기라고 한다. 십자군 전쟁은 그냥 규모가 크고 전장이 달랐을 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전쟁이다. 십자군의 광기로 지목되는 성전 드립, 학살과 약탈은 이슬람이고 동로마고 십자군이고 가리지 않고 지난 수천 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이며 그 이후에도 행해진 일인데 마치 십자군만 특별했던 것처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중세사회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자는 주장이다. 과거에는 십자군 전쟁을 19세기 제국주의를 보는 시각으로 해석하거나 20세기의 종교적 감수성에서 해석하는 시대착오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 시기와 그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전쟁과 크게 다를것도 없던 십자군 전쟁만이 유독 (다른 전쟁들과 구분되는) 광신으로 빚어진 참극으로 주목받아왔다.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보다 동시대 다른 전쟁들과 비교연구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전쟁이 빈번했던 중세 유럽사의 많은 전쟁들과 규모는 다를지언정 비슷한 양상을 보였으며, 실은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십자군 전쟁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는 '''사실 모든 역사적 사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관련 역사학자, 문필가, 대중매체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 고민, 세계관에 따라 해석 되었다'''. 서유럽 세계 전반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주의가 몰아 칠 때는 비이성적인 광신으로 인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삽질로 평가했고, 그 이후 제국주의뽕을 쫙 빨아먹고 다른 문명과 인종을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로 깔아뭉갤 때는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현대 사회에 들어 서구중심주의가 강력하게 도전받고, 이에 대한 대항마로 [[옥시덴탈리즘]]적 관점이 유행할 때는 다시 악랄한 유럽 제국주의의 시초로 보았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 기존의 서구중심주의의 대항마로 부상했던 옥시덴탈리즘적 관점도 이제 혁파 돼야할 낡은 관점이 되어버리고, 실증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이슬람권 내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면서 기독교 vs 이슬람 같은 듣기에는 빠방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단순화와 이분법적 관점 자체를 거부하고, 덤덤하게 후대의 관점에서 실제로 그 시대에 뛰며 먹고 살았던 개개인의 역사적 주체들의 (historical actors) 자발성을 (agency) 강조하는 현대의 시각이 부상한 것이다. 전공 분야에 대한 세분화가 깊게 진행되고, 역사적 사실 관계를 뭉떵그려 단순화하는 거대한 프레임 자체에 회의적인 현대 학계의 관점에서는 사실 11세기 부터 일러도 14세기, 관점에 따라 15세기, 16세기까지, 매번 이름만 '십자군'이란 상표를 걸었을 뿐이지 실제로 발생 동기, 목적, 관련 세력, 진행 방향 모두 판이하게 달랐던 300~400년에 걸쳐 터졌다가 수그러지기를 반복했던 현상을 '십자군 전쟁'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만 뭉떵거리고 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를 무리수로 본다. 임용한도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은 어마어마한 논란을 낳았는데, 세 가지는 말씀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요. > >첫째,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것, 정의의 전쟁이라 불린 것, 십자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한참 뒤의 주장이고) 그 뒤에 악용해 먹으면서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둘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 우리가 앞으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하겠지만, 앞으로 나올 전쟁사의 절반은 중동이 끼어있어요. 중동은 위치상 세계문명의 교차로라구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의 패러다임이 계속 사용 되는 거에요. 한쪽은 성전으로, 한쪽은 우리가 당했는데 또 당한다는 식으로. 그러니 분노는 재생산되고, 여기에 대한 악용과 반감도 같이 커지고. (중략) >그리고 중세로 돌아와보면 좀 더 복합적인 일이 얽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속죄한다고 성지 탈환한다고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게 말이 되냐. 그래서 표면 그대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침략 전쟁이었다." 또는 "종교적 광신에 의해 이교도들을 다 죽이라 그랬다."고 말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인들을) 짐승으로 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셋째, 돈 때문에 일어났다? 돈 때문에 간 사람도 많아요. 왜냐면 중세 사회는요, 30~40%가 극빈층이었어요. 그래서 어디에서 뭐가 났다고 하면 다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기사들도 돈을 벌러 갔느냐? (그건 아닌 게) 자기 전 재산을 팔고간 기사들도 수두룩해요. 70년대까지 만해도 가장 유력한 가설이 상속을 못 받은 차자(次子)들이 봉건제는 장자에게만 세습이 되니까 상습 못 받은 사람들이 돈 벌러 갔다 이랬는데, 후에 자료를 확인해 보니까 상속 못 받으면 둘째는 거지가 되냐고. 둘째라도 어쨌든 귀족인데. 형네 얹혀서 살면 되지 왜 거기까지 가느냐고. 그리고 당시에는 거기까지 가는 데 2년 정도 생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자기 땅 팔고 가고, 요즘 말로 하면 [[고리대금|대부]] 받아서 평생을 갚아요. 물론 돈을 벌러 간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37부 십자군 원정 1부.'''[[https://youtu.be/WxwyKk3xL4A?t=13m10s|영상 13분 11초]]부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